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 병합 (문단 편집) == 전개 == [[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으로 2월 12일 슈슈니크를 초빙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가 도저히 수용하지 못할 제안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당|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데는 동의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으로 밀어준 자이스잉크바르트는 폭력 노선을 주장하던 다른 오스트리아 나치당 지도부와 달리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려던 온건파였기 때문에 슈슈니크 입장에서 나쁜 제안은 아니었으며 슈슈니크와 자이스잉크바르트는 [[극우|성향이 비슷한 데다]] 조국전선 시절 한솥밥을 먹기도 해서 꽤 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독일에 합병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독일의 외교를 적극 지지할 나라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고 무솔리니가 1934년처럼 나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이 정도 선에서 합의를 본 것으로 끝내려고 했으며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보낸 공개적인 지시에서도 "슈슈니크와의 합의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어떠한 마찰도 해소되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허나 위의 생각과는 달리 아래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말단들은 독일과의 통합이 다가왔다고 여기고 과격한 폭력 활동에 돌입했다. 국내의 치안 불안에 말려든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제안하여[* 나치당 지지율이 높은 젊은 층의 투표 참여를 막기 위해서 투표 연령을 높이고 나아가서 슈슈티크 본인이 범무장관으로 학살했던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려고 하기도 했다. 슈슈니크는 1936년에 비밀리에 불법 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 인사들을 초청해서 안슐루스 반대에 협조하는 대가로 사회민주당을 합법화하는 거래를 추진했다.] 독일과의 합의를 무시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국민투표 제안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것을 안 히틀러는 격노해 "이건 사기투표이니 독일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투표의 중지와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수상직 이양을 요구하는 한편 3월 10일에 오스트리아 제압 작전을 지시했다. 3월 12일에 [[독일 국방군]]을 월경시켜 무력으로 오스트리아 국토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이 정보는 오스트리아에 누설되어 오스트리아 정부에 충격을 주었다. 3월 10일 오후 4시 슈슈니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지만 정작 오스트리아 대통령인 빌헬름 미크라스가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 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은 [[빈(오스트리아)|빈]], 린츠, 그라츠, [[인스브루크]] 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었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는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독일 육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했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 차량들이 오스트리아의 민간 주유소에서 돈을 주고 [[휘발유|가솔린]]을 조달함은 기본이었고 행군 상황도 개판이라 사단장이 예하 부대의 현 위치를 못 파악하였으며 선봉은 오스트리아 영내에 있는데 후방지원 부대는 [[병합]]작업을 진행하는 그 순간에도 오스트리아 국경을 못 넘고 있었다. 이 꼴을 본 '''[[이탈리아 왕국]]'''의 오스트리아 주재무관이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독일군의 행군 군기는 극히 열악하다.]]"''' 는 지당한 말을 했다. 만약 오스트리아 주민과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격렬했다면 [[병합]]이 완전히 물 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권력조차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이와 같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열렬환 환영에 대해 독일군은 '꽃의 전쟁’(블루멘크리그: Blumenkrieg)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러한 열렬한 환영은 나치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도 어리둥절해했다고 한다.] 미크라스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했다. 여론을 못 이겨 미크라스가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14일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린츠]]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5-083-10%2C_Anschluss_%C3%96sterreich%2C_Wien.jpg|width=100%]] || [[파일:Military parade at the rally on the Heldenplatz in Vienna.jpg|width=100%]] || || 오스트리아 수도 [[빈(오스트리아)|빈]]에 입성하는 히틀러 일행 || 빈에서 열병식을 하는 독일군 || 좌측 사진은 1938년 3월 빈을 방문하는 히틀러 일행의 사진으로 나치 고관들과 경호원들이지 일반 독일군이 아니다.[* 여담으로 사진에 나와있는 차량들은 [[메르세데스-벤츠]] 320 CABRIOLET B로 당시 기준으로도 굉장한 고가의 승용차다.] 오른쪽 사진은 오스트리아 합병을 기념하여 히틀러 앞에서 열병식을 하는 독일 국방군 10사단이다. ||[[파일:플 Heldenplatz_Rede_Adolf_Hitler 1938.jpg|width=600]]||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youtube(xH512bG_HXs)]}}}|| || [[1938년]] [[3월 15일]], 빈의 헬덴 광장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 위 영상에서 히틀러의 연설의 내용은 이렇다. >"[[나치 독일|독일]]과 [[퓌러|국가의 지도자]](총통) 및 수상으로서 나는 독일 역사에게 이제 나의 고국이 독일국에 들어왔음을 선언하노라. 독일 민족의 가장 오래된 동쪽 지방이 이 시점으로부터 독일국의 가장 새로운 요새가 되었다, 일부 외신들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잔혹한 방법으로 합병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독일과의 합병이 당연했다는 것을 말했을 것이다. 나의 정치적인 투쟁은 국민들의 사랑으로 쟁취한 것이다. 내가 그러한 국민들의 사랑을 직접 경험한 것은 국경을 넘어 들어왔을 때였다. 우리는 군림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서 온 것이다."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youtube(hRSwWuVtHF4)]}}}|| || 빈에 입성, 오스트리아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히틀러 || 이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투표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투표소를 경비하는 독일군 앞에서 공개투표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결과는 97% 찬성. --정답률 3%의 킬러 문항--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immzettel-Anschluss.jpg|width=100%]]}}}|| || 찬성 쪽의 동그라미를 가운데에 [[크고 아름다운|크고 아름답게]] 그린 불공정한 [[투표용지]] || ||Volksabstimmung und Großdeutscher Reichstag 국민투표와 대독일 [[제국의회|국회의사당]]. Stimmzettel 투표용지. Bist du mit der am 13. März 1938 vollzogenen 귀하는 [[1938년]] [[3월 13일]]에 실시된 Wiedervereinigung Österreichs mit dem Deutschen Reich [[오스트리아]]와 [[나치 독일|독일]]의 재[[통일]][*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합치기 때문에([[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 참조) 재통일이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1990년]]의 동서독 통일도 독일에선 재통일이라고 부른다.]에 einverstanden und stimmst du für die Liste unseres Führers {{{+3 '''Adolf Hitler?'''}}} 동의하고 우리의 [[나치 독일 총통|총통]] [[아돌프 히틀러|{{{+3 '''아돌프 히틀러'''}}}]]의 후보자 명단을 지지합니까? {{{+5 '''Ja''' }}} / {{{-5 N e i n }}} {{{+5 '''네''' }}} / {{{-5 아 니 오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8px-Bundesarchiv_Bild_137-049278%2C_Anschluss_%C3%96sterreich.jpg|width=100%]]}}}|| 병합 후 국경표지판을 떼어내고 차단기를 철거하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 관계자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